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단양 장씨 (문단 편집) == 인물 == 단양 장씨(丹陽 張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선단양(先丹陽)으로 불리는 첫째 계통(系統)은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증손(曾孫)인 지현(之賢)의 아들 장순익(張順翼)이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단양군(丹陽君)에 봉(封)해졌으므로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삼게 되었고, 후단양(後丹陽)으로 불리는 둘째 계통(系統)은 태사공(太師公) 정필(貞弼)의 14세손(世孫)으로 결성부원군(結城府院君)에 봉(封)해졌던 장 사(張 사)의 둘째 아들 장갑용(張甲用)과 셋째 장무용(張戊用)을 관조(貫祖)로 하는 계통(系統)이다. 각(各) 계통별(系統別)로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代表的)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단양군(丹陽君) 순익(順翼)의 아들 재일(載鎰)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역임(歷任)했고, 그의 아들 한문(漢文)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歷任)하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한편 조선조(朝鮮朝)에서 황해감사(黃海監司)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歷任)했던 중란(仲蘭)의 아들 윤화(允和)는 정용낭장(精勇郎將)으로 한양환도(漢陽還都)에 공(功)을 세워 단산군(丹山君)에 봉해졌으며, 태종(太宗)과 동갑계원(同甲契員)으로 친분(親分)이 두터웠다. 그의 아들 지(祉)는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지내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며 매서운 절개를 지켰다. 장충범(張忠範)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원년인 1592년(선조 25)에 충주에서 왜군과 싸우다 부상하여 향리인 삼생리로 피신했다. 1597년에 의병을 일으켜 생극면 생리 구지테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1605년(선조 38)에 전지로 복권이 하사되고 1857년(철종 8)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의 충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윤덕(胤德)이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여 영주(榮州)·풍기(豊基) 등지(等地)에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던 중(中) 부상(負傷)하여 체포(逮捕)된 뒤에도 계속 항거(抗拒)하다가 총살(銃殺)당했다. 후단양(後丹陽) 계통(系統)에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초기(初期)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歷任)한 덕랑(德郞)과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던 계증(繼曾)이 유명(有名)했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웠던 온(溫)은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단양군(丹陽君)에 봉(封)해져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강(綱), 공조참판(工曹參判) 석규(錫奎),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준(準) 등(等)과 함께 단양 장씨(丹陽 張氏)를 빛냈다. 장호리(張浩利, 1895년 ~ 1971년) : 독립운동가 장우성(張遇聖, 1912년 ~ 2005년) : 현대 화가 장광근(張光根, 1954년 ~ ) : 국회의원 장옥주(張玉珠, 1959년 ~ ) : 제5대 보건복지부 차관 [[장현성]](張鉉誠, 1970년 ~ ) : 배우 [[장현진(카레이서)|장현진]](張玄塡, 1976년 ~ ) : 카레이서 장나라(張나라, 1981년 ~ ) : 가수, 배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